미술계와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즘) 미술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미 우리사회에는 ‘초현실주의’ 미술이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많은 작가들이 창작의 대열에 서고 있다. 일반상식적인 통속미술의 범주를 벗어나 합리주의가 아니며 정형적인 현실의 약속을 뛰어넘는 추상적이면서 광기가 스며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비합리적인 미술이라 하겠다.
‘초현실주의’는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기기묘묘하며 판치생모(板齒生毛)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고 불규칙한 정신주의 미술이라 하겠다. 불자들에게 큰 화두로 알려진 조주스님의 판치생모는 불교 종문(宗門)에서 많이 칭찬하는 화두로 쓰이고 있다. 판치생모(板齒生毛)는 판자에서 이빨이 나고 이빨에서 털이 난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비합리적인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선(禪)으로 견성(見性)하면 화두(話頭)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화두를 이해기는 어려우나 그림에서 그 해법이 나온 것이다.
나는 오늘 피카소의 판화 한 점을 구입했다. 피카소의 인물 판화는 머리가 얼굴과 비례가 맞지 않으며 얼굴에 있어야할 눈이 뒷머리에 달려 있는가하면 비정상적인 인체구조가 그의 사유에서 나온 판치생모나 같은 것이다. 보통 사람이 보면 바보스럽고 광기가 있어 보이며 아이들이 낙서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미술과 비합리주의 미술에 대표적인 화가이다. 피카소의 그림이 조주스님의 판치생모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화두나 같은 미술이다.
초현실적인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수용하고 변화와 창작의 기본에서 발생한 독특한 예술행위이며 미래지향적 미술방법이라 하겠다. 기본의 미의식이나 도덕적인 이성을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반추상적인 요소가 있으며 정상적인 이성의 사고(思考)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초현실주의’ 미술은 상식을 벗어나 있으며 관념의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방법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1896년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파란 자동묘법이라고 하여 창시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현실적인 작품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사회에 널리 회자되지 않았기 때문에 쉬르레알리즘이란 새로운 장르가 나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화가의 사유에서 나타난 모든 방법에 기존의 엄격한 전통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만의 방법을 승화시킨 예술이다. 우리나라 미술계에도 이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존의 풍경이나 정물 등 눈에 익은 작품보다는 새롭고 신선한 초현실주의 방법의 그림이 선호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종 초현실주의 작품과 추상작품을 혼돈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반대의 화법이며 화화 사상도 매우 다르다. ‘초현실주의’ 작품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없는 현상을 그린 것이고 추상은 현실의 상이 없이 색과 형태로 기하학적 표현을 했거나 평면을 그대로 작품화 한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인 형상미를 표현하기 보다는 자유로운 마음의 사유를 그대로 성화시킨 그림이다. 구상과 추상 현실주의와 초현실주의 등 모든 분야가 반추상으로 변하여 어정쩡한 작품이 많다.
예술은 자기만의 특성과 독창성이 요구되는 것이며 모방을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미술이 창작이 아닐 때는 예술의 대열에 설수 없는 것이다. 미술애호가들 중에는 미술에 식견이 있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이 많이 나오고 있다. 현대미술은 상상을 초월하고 상식을 벗어나는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외국작가들의 그림이나 추상작가들의 작품은 감상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장수, 부귀, 행복, 평화 등을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다. 원근(遠近)이나 대소(大小), 강약(强弱)이나 허실(虛實) 등을 무시하고 작가의 진실만을 천착(穿鑿)하는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작업에 임하고 있다. 나의 작업이 초현실주의 방법이지만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모두 기원(祈願)의 부적(符籍)과 같은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행복하고 완성하면 더욱 행복하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 행복의 기(氣)를 담은 작품이라 하겠다.
예술은 거짓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천진스러운 진실의 결정이다. 신성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진실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본성에서 표출되는 합리성을 완성하고 세속보다 한 단계 높은 정신적 사유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이치(理致)만으로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때로는 상식이 통하지 아니하고 엄청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 새로운 예술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는 새로운 예술창작을 꿈꾸고 있으나 그것은 염원 일뿐 번복되는 인간들의 창의력도 결국은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예술도 시대를 앞지르는 일품이 나왔다 하더라도 시간이지나면 모두 퇴색되어지는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시대변화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고 항상 새로운 것이 나오면서 전자(前者)의 예술이 색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특권층이나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예술이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으나 우리주위에는 이미 생활전반에 예술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이 난해한 것으로 생각하고 멀리한다면 영원히 예술을 모르고 지나가는 예술무지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노력한다면 모든 예술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더욱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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