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이두식 화백의 영전에

청계 양태석 2013. 5. 23. 14:11

 

2월 23일 이두식화백이 별세했다. 이 화백을 만난 지 하루 만에 슬픈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화가로서 좋은 화우(畵友) 한사람을 잃은 슬픔이 매우 크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맞이하는 죽음이지만 건강한 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너무도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혔다.

하루전날 정년퇴임식에 초대를 받고 이한우 신범승 화백과 같이 참석했다. 호텔을 꽉 메운 축하객들이 어림잡아 600명은 넘어보였다. 3시부터 시작해서 7시가 되도록 긴 행사에 주체자인 이화백이 지쳐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홍대에서 퇴임기념전을 개최했다. 그리고 뒤풀이로 술을 많이 마신듯하다. 계속적인 행사와 작업에 지쳐있었을 그가 66세의 노인이라는 것도 잊고 술을 마신 것이 신체의 원활한 활동에 장애를 받은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병원의 진찰을 통해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노인이 과로하는 것은 매우위험하다. 젊었을 때는 과로해도 회복이 빠르지만 연세가 높을수록 회복이 늦을 뿐 아니라 회복불능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지난달 중국여행을 다녀와서 피로가 가시기전에 다음날 강원도 스케치여행을 했고 또 진주 출향작가전에 참여했다가 다음날 하동으로 해서 상경했다. 겹치기 여행에 체력의 저하로 갑자기 감기몸살이 한꺼번에 온 것이다. 열이 나고 통증이 일어나 한때 정신을 놓았다.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 한 것이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계속적인 행사를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에 지쳐있으면서도 참석한 것이 화근이었다. 건강은 과신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이두식은 우리화단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추상화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비중 있는 화가의 한사람이 하루아침에 쓰러지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일생이 너무도 파란만장하고 화려했을 뿐 아니라 장래가 보장되는 화가였기에 더욱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나와는 각별한 사이로 서로를 챙겨주는 우정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해 인사동에서 회의를 하고 밤늦게 귀가하려는 나를 자기의 벤츠 승용차로 왕십리 나의 아파트정문까지 데려다주는 등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사동에서 자기그림의 위작이 나오는 것을 나에게 막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두 사람만의 극비로 의논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나는 유통되는 이두식 그림을 살피고 감시해주기도 했다. 장래를 열어가는 여러 가지 거치에 대해서 의논하기도 했다. 서로의 정을 느끼는 참으로 신망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 진출에 성공 서울예고를 거쳐 홍대대학원을 졸업하고 승승장구했다. 그는 애석하게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화려한 경력과 작품생활이 어느 작가보다도 왕성했으며 앞으로의 전망이 너무도 크고 포부도 대단했다.

중국베이징에서 개인전을 하고 큰 호평을 받았으며 1,000여점의 작품주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의 플라미니오 지하철역에 8m의 그림이 모자이크벽화로 설치되었으며 여러 나라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국내외에 70여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했으며 미술계의 마당발로 알려져 있으며 48세에 이미 최연소 미술협회 이사장이 되었다. 홍대박물관장과 기획처장 학생처장 미대학장을 비롯하여 요직을 두루 거친 유능한 교육자였다. 2007년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의 관부를 하고 있으며 국전작가회부회장을 수락해서 동참했다. 나와 ‘갤러리청주’에도 같이 참여하기로 약속해 놓은 상태에서 귀천하셨으니 더욱 마음이 아프고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그를 예술가로 만들기 위해서 신은 갖은고생을 시키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도록 했는가보다. 생활이 어려워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해야하는 사면초가의 나날이 연속적으로 그를 괴롭혔다. 그가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차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고 긍정과 노력으로 자기의 목표를 달성해나갔다. 그는 화가로서의 큰 업적을 남겼고 한국근대 추상화단을 지켜나간 화단의 거목이었다.

특이한 것은 고교동창인 손혜경 여사와 16세에 만나 26세에 결혼하고 56세에 사별했다. 그리고 아내가 귀천한 10년 만에 66세를 일기로 하늘로 돌아갔다. 아내는 암 투병으로 10년을 고생하다가 돌아갔으나 자기는10년 만에 심장마비로 자다가 소천 한 것이다. 그는 아내가 돌아가자 장례 때도 검은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평소에 사랑하는 아내가 좋아했다는 이유로 끝내 안경을 벗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내고 10년 동안 얼마나 가슴 아파 했을까?

그는 그림에는 마침표가 없다고 했다. 그림 자체는 추상이지만 색은 우리고유의 색인 오방색을 쓰고 있다. 한국의 오방색은 흰색, 검정색, 빨강색, 노란색, 파랑색이다. 강렬한 이 오방색으로 한국의 근원적인 미감을 천착하는 노력을 집중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기표현의 작품을 성공시켰다.

그는 그림의 주제를 ‘축제’로 정하고 긍정과 낙천을 근본으로 감성적 ‘색’ 추상이라는 개념으로 한국성 탐구에 주력했다. 특히 한국적이라는 추상미술의 특성을 창조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그의 예술이 크게 부각 되었다.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근원이며 영양제이다. 감상자의 행복을 도우는 것으로서 이화백의 예술이 길이 빛나기를 기대하면서 이화백의 영전에 이글을 올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