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김은호는 그림천재

청계 양태석 2013. 5. 23. 14:10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는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사로 다섯 분의 영정을 모셨다. 북종화가로 인물, 화조, 영모, 초상 등 당대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인 화가였다. 19세의 어린 약관에 어진을 봉사하고 화단에서 총애를 받았으며 1919년에는 3.1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신문]을 직접 등사 배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당은 어린 시절 틈이 나면 그림을 그렸다. 그럴 때마다 부친은 “이놈아 기껏 환장이가 될 것이냐? 앉으면 그림만 그리게” 하며 꾸지람을 했다. 어느 날 중추원참의 김경성과 백당이 심전의 부채그림을 보고 “심전은 명인이야 글과 그림이 모두 빼어났어.” 하면서 칭찬하는 것을 보고 환장이도 대우를 받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백당선생에게 “그림을 그려도 괜찮은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백당은 “청년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모양이군.” 했다. “자네 세필 글씨를 보니 재주가 있어 천하에 명화가가 될지 누가 알겠나?” 하셨다. 그래서 이당은 “사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경성씨가 “그래 그러면 이 부채 그림을 그려준 심전에게 소개를 해주지” 하시며 서찰을 써주셨다.

이당은 큰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날로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선생을 찾아가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서찰을 드렸다.

“자네 누구에게 그림을 배운 일이 있나?” 하고 질문을 했다. 이당은 배운 일은 없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심전은 고금화보를 주며 미인도를 그려보라고 했다. 미인도를 현장에서 그려보였다. 심전은 그림을 보고 만족하다는 표정으로 “재주가 있군, 배우면 되겠어.” 하시며 서화협회에 입학 허가를 해 주셨다. 그때 화과의 교수는 조석진, 안중식, 강필주, 이도영, 김응원 등이었다.

서화미술회에 들어가 소림과 심전에게서 수묵과 채색을 공부 했다. 그림공부를 하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 미술회에 오라는 연락을 받고 학교에 달려갔다. 들어서자마자 심전선생께서 봉투를 건네주면서 “자네 집안이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돈을 여러 명이서 조금씩 모았으니 이제 부터는 공부만 열심히 하게” 하셨다. 봉투에는12원이 들어있었다. 어머님께 그 돈을 드렸다. 돈을 받아든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때 마침 송병준씨가 자서전 책에 실을 초상화를 협회에 주문을 해왔다. 그때 심전과 소림은 이당에게 그리라고 했다. 1호정도의 초상화를 그려주니 화료(畵料) 30원을 주었다. 그 돈으로 조금 나은 집으로 이사하고 방이 없어 친정에 가있던 아내를 오라고해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

궁중에서 어진 주문이 왔다. 심전선생께서 고종의 어진초본을 그려보라고 했다. 임금에게 잘 보이면 어용화사가 된다면서 기회를 주었다. 그림을 그린 지 21일 만에 큰 영광이 돌아온 것이다. 사진을 보고 그린초본을 본 고종임금께서 흡족해하시고 윤비의 백부인 윤덕영에게 그 일을 마무리하라 명령했다. 그때 이미 일본인들이 초상을 그리고 있었지만 고종임금은 일본인들을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심전이 소개한 어린 이당이 그리도록 배려했다. 이때 일본 화가들의 불만을 피하려고 고종보다 순종의 어진을 먼저 모시게 했다. 어진을모시고 나서 심전선생은 “이제 어용화사가 되었으니 별호가 있어야지”하시며 이당(以堂)라고하게 하셨다. 심전선생은 이당이라는 호를 주역에서 선명한 것이다.

사람이 재주와 운이 맞아야 출세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이당선생은 재주도 출중하지만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순종의 어진은 4개월 만에 완성하고 4천원이란 거금을 받았다. 고종어진을 모실 때는 더욱 사랑과 편리를 베풀어 큰 영광을 얻었다. 고종의 사랑과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4개월 만에 어진을 완성시켰다. 일약 어용화사가 되어 장안에 화제꺼리로 회자되고 있었다.

1925년 장안에서 서화소장가로 유명한 단우(丹宇) 이용문(李容汶)이라는 부자가 자금을 만들어주며 일본유학을 하라고 했다. 이때 이당은 혼자 가는 것보다 친구인 소정변관식과 같이 가는 것을 원했다. 소정도 같이 보내달라고 해서 허락을 얻었다. 단우는 거금 500원씩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경비를 매달 150원씩을 보내주었다.

일본에서 이당은 인물대가인 결성소명(結城素明)에게서 배우고 소정은 소실취운(小室翠雲)에게서 산수화를 배웠다. 두 사람은 은인에게 보답하기위해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성덕(聖德)전에 출품하여 나란히 입선했다.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두 사람은 6대작가로 활약하고 근대 한국화단의 추성(樞星) 같은 존재로 미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후학(後學) 아천(雅泉 김영철(金永哲)화백은 여러 가지 일화를 증언해주었다. 이당선생은 국내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후학도 많이 배출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당선생은 음악도 일가견이 있어 국악인 박헌봉씨와 교유하였으며 정악과 여러 가지 가사, 지름시조, 평시조, 사설시조 등을 잘하시고 때로는 시창도 하셨다고 증언했다.

삼성의 이병철회장이 이당화실에 가끔 오셨고 이당선생의 그림을 좋아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한번은 일본에서 노방주 10필과 석채를 거액을 주고 구입해서 선물하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은 부탁한 자기초상화를 보고 감탄하여 자식들 숫자대로 그려서 하나씩 주었다는 말이 있다. 이 회장은 어느 날 “이당선생의 그림을 모두 내가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거금을 주셨다고한다.

하루는 고종임금이 덕수궁으로 이당선생을 불러들여 어진봉사에 착수했다. 소례복 모창을 쓰고 어용하사복장으로 덕수궁을 출입 했다. 고종은 이당의 손을 만져보고 머리도 쓰다듬으며 “어쩌면 이렇게 살결이 고우냐?” 하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나이도 어린데 어쩌면 그렇게 재주가 좋으냐?” 하시는 인자한 고종의 음성이 귓전에 맴돌고 자상한 배려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임금이 손을 잡으면 어수에 성은을 입었다는 영광을 기리기위해서 은토시를 끼고 손을 씻지 않았으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어진을 모시는 내내 제공받은 음식은 다시 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규칙 때문에 그릇 채 이당본가로 보내져서 이웃에 잔치를 열고 그릇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근년에 와서 이당선생이 친일파로 소문이 난 것은 ‘금채봉납도’ 때문이다. 금채봉납도를 그리게 된 것은 애국여인회를 이끌고 있던 윤비(尹妃) 백부윤덕영가의 부인이었다. 이당이 궁중출입을 할 때 필요한 의관을 제공하고 여러 가지 법도를 알려준 은인이 부탁하는 그림을 차마 거역하지 못해서 그린 그림이다. 금채봉납도는 여인이 금비녀를 조선군 사령관에게 바치는 사진을 그린 것이다.

이당은 어진을 모신 경험으로 많은 선열들과 애국지사의 영정을 그렸고 외국 사람들의 초상화도 그렸다.

사실 일본 식민지시대에 그 정도를 친일로 본다면 우리국민 중에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금채봉납도 외에도 여러 가지 정황이 있겠으나 지난 역사에 때한 문제는 실로 풀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당은 천재적인 재주와 시대적인 배경이 그를 필요로 했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진화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함부로 친일로 예단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겠다. 그리고 작금에 우리화단에 이당만큼 제자를 아끼고 자기 집에서 기식시키며 교육시킨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당의 제자 중에는 운보, 월전, 현초 등 기라성 같은 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왕조시대와 근대민주국가로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해온 우리나 화단의 6대가는 실로 지대한 예술적 영향을 폄하하는 것은 그네들의 업적에 비해서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