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는 이인상의 그림에 대해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넘치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전각(篆刻)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는 고결함이 있다고 했다. 성격이 대쪽같이 곧아 그림에 나타난다. 청아한 성품과 담백하면서도 투명하며 깔끔한 멋이 신선하고 아름답다. 사인화가(士人畵家)들이 그리는 공통된 단조로움이 있어도 운치와 여유가 있는 수작이 많으며 따라서 후세화가들에게 사표가 되기도 했다.
이인상은 1710~1760(영조36)년 간에 시, 서, 화 삼절로 조선후기대표적인 화가로 이름이 높다.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도는 보산자(寶山子) 등이다. 그는 3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며 1735년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증조부민계가 서출이었다는 관계로 본과에 이르지 못하고 음보(蔭補)로 북부(北部)참봉(參奉)이 되었고, 음죽 현감, 지리산 사근역 찰방을 지냈으나 몸이 쇠약하고 상사와 다툼이 있어 관직을 그만 두었다. 성정이 곧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탐관오리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관찰사와도 불협화음이 빈번해서 결국은 관직도 그만두고 야인으로 또는 화가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는 평소 좋아하던 단양에 은거하면서 벗들과 시, 서, 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윗대에서 서출이라고 해서 그것이 인격을 가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높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세인들의 폄하를 감수하면서 예술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그는 명문가출신답게 학문이 뛰어났고 성정이 고고하여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림재주가 있어 여러 가지 장르를 답습했으나 특히 문인(文人)화에 능하여 당대에 대가 반열에 올랐다.
이인상은 소나무를 즐겨 그렸다. 화가들은 본인의 성정에 맞는 주제와 소재를 만나면 계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작가들의 습관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기의 그림 주제가 정해지면 같은 내용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이인상은 곧은 성격과 선비정신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표출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지조와 청렴을 나타내는 소나무소재를 많이 이용했다. 그래서 군자의 정신을 담아낸 품격 있는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요즈음 세상에도 정신이 바르고 곧은 사람은 혼탁한 사회를 적응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림이 별종이거나 뛰어난 재주가 아니면 입신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수준으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이인상이 가난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송설도(松雪圖)는 이인상의 대표작이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를 소재로 그린작품이며 구도나 화법이 특출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의 이인상은 그림에서도 그대로 그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송설도는 중앙에 훤칠한 소나무가 늠름한 기상으로 꼿꼿이 서 있으며 그 뒤로 휘어진 소나무 하나가 쓰러질 듯 눈길을 끈다. 한마디로 만고의 풍상을 겪은 노송의 인내를 보여주는 듯하다.
설경을 그릴 때는 눈 쌓인 풍경을 나타내기 때문에 유백법(留白法)을 이용했다. 그림에서 눈은 먹을 칠하지 않으며 흰 지면을 그대로 남겨두고 사물에만 먹으로 선을 그린 뒤에 엷은 담묵으로 음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인상의 전체적인 회화세계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상상화이며 실경도 간혹 볼 수 있으나 전설적이거나 문학에 나타난 배경을 주로 소재를 삼았다. 심지어 구룡폭포를 그리면서도 실경을 합리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고 자기 화법을 적용하여 창의적으로 재구성하는 그림을 그렸다.
사승(師承)의 관계는 알 수 없으나 개자원화전을 위주로 그린 흔적이 보이며 중국의 화풍을 자기화 시킨 개성 있는 화풍을 창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이윤영(李胤永)과 후대의 윤제홍(尹濟弘), 정수영(鄭遂榮), 이재관(李在寬), 김수철(金秀哲) 등의 화풍도 이에 연결되어 있으며 후기 문인화의 한 맥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이 엿보인다.
서체는 안진경을 따랐으며 강직하고 고결한 성품이 나타나고 있으며 글씨를 쓸 때도 그림에 쓰는 건필(乾筆)을 중요시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선의 경지를 얻은 것은 천성적인 체질적 묘법이며 개성이다.
이인상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오로지 서화에 매진하면서 지우들과 담소하면서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켜나갔다. 따라서 그의 업적은 관료보다는 화가로 서예(書藝)인으로 남는 것을 오히려 보람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사회적 제도 풍습에 항거하는 정신적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재주를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나라발전에도 큰 저해가 되었다. 제도에 억매여서 자기 재주를 적격적소에 쓰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때에 비하면 현대인들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그러나 아직도 여러 가지 요인으로 재주를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따라서 더욱 자유롭고 건설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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