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는 근대 동양화단의 거장이며 우리화단에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보통사람들과 달리 많은 시련을 타고 태어났다. 출생한지 한 달도 못 돼서 20여 시간동안 숨이 끊어져 깨어나지 못하자 죽은 줄 알고 포기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 무럭무럭 자라며 어린 시절 천자문과 통감을 배우고 보통 아이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의 운명을 뒤집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곱 살의 어린나이에 장질부사로 청신경이 마비된 것이다. 그래서 한 평생을 농아로 살아가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4~2001)은 서울 돈화문 근처에서 자랐다. 총독부 토지 관리국에 다니는 아버지 김해김씨 승환씨와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났다. 그는 4살 때에 이미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유치원에 다니며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내며 별 탈 없이 자랐다. 7세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봄 소풍을 장충단공원에 갔으나 한기가 들고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니 장질부사라고 했다. 이때 치료가 잘못되어 청각마비로 평생을 농아로 살아야 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치료한다고 경비를 많이 쓰고 아버지도 실직을 당하고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가 취직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취직자리가 서울이 아니고 개성이었다. 잘 아시는 교장선생님의 주선으로 학교교사직을 하게 되었었는데 개성에서 2년을 지냈다. 그러나 다시 서울로 올 수밖에 없는 집안사정이 생겼다. 어머니는 서울에 온 후 다시는 개성으로 가지 못하고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운보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는 농아인 채 승동보통학교에 다녔다. 어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우고 교과서를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명과 싸워 이기는 등 성격이 호방하고 용기가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며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17세가 되던 1930년 가을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이당 김은호선생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큰절을 올리도록 시켰고 이후 운보는 선생님을 47년간 찾아뵈올 때마다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18세 때에 안국동 어느 집을 지나는데 처녀들이 널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문틈으로 스케치해서 선생에게 보여드렸다. 선생은 그림을 보고 만족해하시며 크게 그려 오라고 했다. 그래서 150호정도의 밑그림을 그려서 보여 드렸다. 선생님은 선전용으로 허락해서 열심히 그려서 선전에 출품했다. 소식을 기다리던 차에 어느 날 규당 한유동선생이 신문을 들고 들어와 “붙었다. 붙었어.” 하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생전 처음으로 선전에 입선하니 장안의 신문들이 일제히 귀먹고 말 못하는 18세 소년이 그 어려운 선전에 입선했다고 크게 보도를 해 주었다. 어머니는 평생소원을 풀고 큰 기쁨을 얻었다고 했다. 이때가 1931년 여름이었다. 그 그림을 어머니가 다니던 세브란스 치과과장 부스박사가 거금100원을 주고 사서 병원에 걸었다고 한다. 1932년에도 300호정도의 그림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19세의 약관에 선전입선을 하고 기뻐하지도 못한 채 어머니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니 슬프고 안타까운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슬픔에 잠겨있는 어린제자를 이당선생이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
운보의 나이가 20세가 되던 해의 일이다. 너무도 가난하여 아침거리를 겨우 구해서 식사를 하고 나면 저녁거리가 걱정이고 저녁거리를 구해서 끼니를 때우고 나면 또 아침이 걱정되는 처지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영양부족으로 얼굴이 부어 부앙이 걸려있고 참담한 모습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때에 60이 넘은 외할머니가 바느질을 해서 끼니를 때우는 처지였다. 심지어 외할머니의 옷가지를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쌀을 구하는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참을 수없이 괴로운 것은 찢어지도록 가난한 것보다 세 번째 입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슬픔이었다. 너무 어렵다는 소문을 들은 부스박사는 김기창을 자기 집으로 불러 그림을 몇 점 그려오라고 했다. 부스박사는 여러 점의 그림을 지인들에게 부탁해서 팔아주었다.
1940년 일제가 선교사 및 미국인들을 추방하면서 부스박사도 한국을 떠났다. 그 후 10여년이 지나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부스박사는 어려울 때 6호 8호의 소품을 수 십 점 팔아주어서 생활의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은인들이 떠나고 또다시 외롭고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운보는 24세 때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매일신보에 농아로서 특선을 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일약화단에 명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연속4회 특선으로 27세의 최연소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때 아내인 박래현은 동경여자미술학교 3학년 때 선전에 출품한 작품이 총독상을 받았다. 박래현은 소문으로 듣고 김기창을 노대가로 알고 인사차 방문했다. 그때 인연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박래현은 나이가 많은 줄 알았던 김기창이 젊고 농아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가 도와야겠다는 동경심과 패기에 찬 중견화가라는데 대해서 마음을 주고 말았다. 박래현의 부모가 극구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밀어 붙였다. 운보가 우향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운명적이며 큰 행운이었다. 1946년 3월에 여러 가지 난간을 극복하고 운보(雲甫)는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두 사람은 76년 우향이 타계 할 때 까지 서로협력하며 예술의 동반자로 행복을 누렸다. 1948년에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부부전(夫婦展)을 열기도 했다.
6.25때는 우향의 친정인 군산으로 피란을 했다. 피란지에서 틈틈이 예수의 생애를 한복차림으로 30여점을 그려서 그의 화로(畵路)에 큰 획을 그었다.
1956년 우향이 제5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는 등 부부미술이 한국의 중심에 서면서 활발한 예술 활동이 화가들의 부러움을 샀다. 운보는 정열적인 창작활동을 했으며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를 창작하여 애호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침묵의 세계를 딛고 일어선 운보의 생애는 운명적 불운과 영광이 교차하는 하나의 드라마와 같은 생애였다. 64년에는 미 국무성 초청을 받았고 69년에는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홍대와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세종대왕과 무열왕 등 역사인물들의 영정을모셨다. 그리고 1만 원권 지폐 세종대왕상을 그렸고 3.1문화상을 수상했다. 81년 농아복지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를 창립했다. 충북청원에 장애자시설 “운보의 공방”을 개원했다. 76년 사랑하는 부인이 타계하고 한동안 시름에 빠져 정신적 공황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이산가족상봉 때 북한에 있는 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96년 후소회(後素會) 6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에 참석하고 뇌출혈로 쓰러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는 농아이면서도 불굴의 정신과 도전으로 미술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으며 인간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으로 우리화단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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