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화가로 알려진 6대가의 한사람인 소정 변관식선생의 인생행로는 격변기의 한국근대 역사가 배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그림을 감상해보면 독특한 개성과 고집스러운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금강산 그림은 실경산수의 특징을 살려 자기만의 화법을 창안하였다. 그는 성숙기에 접어들어 파선법(波線法)과 적묵법(積墨法)을 개발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의 명작을 많이 남겼다.
소정(小亭)변관식(卞寬植)은 1899년 황해도 웅진에서 조선 마지막화원인 소림조석진의 외손자로 태어나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외가에서 성장했다. 1910년에 외조부를 따라 상경(上京)하면서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소정이 그림에 관심을 보이자 소림은 외손자의 그림공부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15살 때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소정은 취미를 살려 서화미술회에 드나들었다. 정식입학은 아니지만 조석진의 후광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림솜씨가 출중하여 20대에 이미 대가반열에 올랐다. 외가 집에서 자라다보니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고 약간 반항적으로 형성되어 누구와도 잘 다투며 날을 세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친구도 잘 사귀며 고집스러운 성격은 그림에 개성으로 표출되었다.
1919년 현씨 부인과 결혼했다. 예술가로서 당당히 입신하였고 가정도 잘 꾸려가는 행복한 가장이 되었다.
1925년 서화소장가로 유명한 단우(丹宇) 이용문(李容汶)씨가 유학자금을 만들어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와 같이 일본유학을 보내주었다. 단우가 처음에는 김은호만 유학 보내려하였으나 이당이 소정을 적극 추천하여 같이 유학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단우가 두 사람에게 거금 5백 원씩을 주고 의복도 고급으로 사 주었다. 단우는 자기 집 2층에서 시서화(詩書畵) 동인들을 모아 송별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소정과 이당은 막역한 친구로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도일하여 이당은 결성소명(結城素明)문하에서 인물화공부를 하고 소정은 소실취운(小室翠雲)문하에서 산수화를 공부했다. 단우는 이당과 소정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어 공부에 지장이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은인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더욱 열심히 했다. 두 사람은 일본 성덕(聖德)전에 출품하여 나란히 입선의 영광을 얻었다. 소정은 이당보다 7살이 아래지만 친구로 지내고 서로를 위로했다. 이당이 제전에 먼저 입선을 하였고 용돈이생기자 술을 좋아하는 소정의 주량을 채워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친분이 두터웠으며 이후 6대가로 근대 한국 화단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929년 귀국하여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다. 일본유학을 함으로서 새로운 자기 경지를 개척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산수화로서의 입지가 굳어졌다. 화신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기도하고 40세에 금강산 유람도 했다. 그때 스케치하여 그린 그림이 소정만의 독특한 금강산 그림이 되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6.25동란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해서 영도에 있는 도자기공장에서 도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한때 진주에 있으면서 청년단장을 맡아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55년에는 화단의 온당치 못한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하였다. 국전심사위원 위촉이 잘못되었다고 신문에 투고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7년에도 연합신문에 국전비리를 폭로하여 미술행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는 낙선자전시를 하는 등 적극적인 반발로 미술계의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부인과 사별하고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 강씨(姜氏)와 재혼했다.
전주에 잠깐 머물면서 마음씨 좋은 주모를 만나 시봉을 받으며 진주까지 왔다. 그러나 진주에서 강씨와 혼담이 있어 지금까지 같이 지내던 주모를 이제 전주로 돌아가라고 하니 “선생님 3년을 밥 지어드리고 옷 빨아드리고 하라시는 대로 했는데 이제 와서 가라고하십니까?” 하고 하소연을 하니 “이 사람아 이 천하에 소정이 3년씩이나 데리고 살아 주었으면 큰 영광이며 고맙게 생각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여” 하고 꾸지람을 했다고 한다. 진주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으며 주로 병풍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먹거리를 해결하기위해서 쌀 한가마니에 병풍그림 한 벌을 그려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박생광 성재휴 허민 등 당대 유명 예술가들과 교유하였으며 지방예술계의 거장으로 노력하였다. 서울 수복 후 상경하여 중앙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1962년에 예총 미협 부회장에 추대되었으며 64년에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69년 71세에 예총회관에서 고희전을 열었다. 78세에 금강산 진주담을 그리고 별세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역전을 겪으면서 화단의 거장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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