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술과 그림에 취한 늙은이 취옹(醉翁) 김명국

청계 양태석 2013. 5. 23. 14:10

 

 

김명국은 선조36년(1600년)에 태어나고 화재(畵材)가 출중하여 궁중화원으로 임용되었으며 조정의 인정을 받아 교수를 지냈다. 안산인으로 자(字)는 천녀(天汝))요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산수, 인물, 괴석 등 다양한 그림에 능했다.

김명국은 스스로 취옹이란 호를 쓰면서 술은 두주를 불사했고 술에 취해서 그림을 그렸으며 문자 그대로 취옹(醉翁)이었다. 술에 취해 일필휘지하면 득의(得意)의 작품이 나왔으며 신비로운 필치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대 선화계에서는 추앙받는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예술과 그림과 인생이 같이 어우러져 탈속의 경지에 이르러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의 그림은 독특한 개성으로 고법을 초월했으며 신기(神技)를 이어가는 화계의 달인이었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유머가 풍부하며 술에 취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남송. 선승(禪僧)들의 필치를 뛰어넘어 활달하고 기운(氣韻)생동(生動)의 신품으로 관자를 놀라게 하는 기인중의 기인화가였다.

김명국의 득의작(得意作)은 대부분 대취해서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영남의 승려 한분이 찾아와서 명사도(冥司圖)를 부탁을 하면서 비단 수필을 예폐(禮幣)로 드리니 그 비단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술값을 충당케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술에 취해서 스님이 부탁한 그림을 일필휘지로 그린 그림이 괴물의 형상과 죄를 짓고 끌려오는 죄인, 불에 타서 죽는 사람, 돌에 깔려 죽는 사람 등 모두 화상 비구를 만들어 놓으니 스님은 보고 놀라서 “어허 공은 어찌하여 남의 대사를 그르치십니까.”하니 연담은 “너희들의 일생악사가 바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이니 지옥에 들어갈 놈 등이 너희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 하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있다. 스님이 그림을 모두 불 질러 버리고 폐물을 돌려달라고 하니 연담은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완품(完品)을 갖고 싶으면 술을 더 사오느라“ 하였다. 그러자 술을 더 사오게 되었고 술에 대취해서 필을 드니 득의의 작품이 나왔다. 채색도 고루 설채하니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한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단숨에 그리고 붓을 던지며 술을 더 부어라 하고 호기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님은 “공은 진실로 천하의 신필입니다.” 하고 큰절을 올리고 떠났다고 한다.

김명국은 1646년(인조14년)에 37세의 나이로 통신사의 일원으로 도일했다. 그는 일본에서 생소한 조선의 회화예술을 선보이고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 일본전역에서 김명국의 그림이 신필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가 작품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동시대의 학자 김세렵의 (해사록)에 따르면 그림요청이 너무 많아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달마도는 그때 일본에서 그린 것을 국내로 들여왔으며 통신사 수행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 된다. 1945년 소현세자 빈궁도감의 혼궁수리소에서 모란병풍을 그렸으며 1649년에(효종즉위) 인조의 국장도감에서 산수병풍을 그렸다.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화법으로 산수, 인물, 수석을 잘 그렸으며 수묵 담채의 명수였다. 성격이 소박하고 호방하여 해학에 능하고 술을 즐겨 마시고 취하면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가 다시 술을 청하고 대취하면 득의의 작품이 나올 정도였으니 호(號)를 취옹이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청하려고 하면 반드시 술을 가지고 방문했으며 그래서 술 미치광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신위(申緯)의 (연담화첩)에서 화평은 격찬을 썼다. “인물이 생동하고 필묵이 혼융하여 백년 안에는 이만한 화가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했다. 김창흡(金昌翕)도 산수도에 제하기를 “연담의 필치가 이처럼 신묘하여 한번 보고나면 수 십 년을 탄복할 것이다.” 라고 했다.

유작이 많이 남아있지 않고 아무데서나 접할 수 있는 작품이 없어서 보통사람들은 선화나 달마작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연담은 다양한 그림을 소화 할 수 있는 훌륭한 화선(畵仙)이었으며 필선의 절묘함은 탈속의 경지에 이르러 전무후무한 명인중의 명인이었다.

일본에서도 그때 남긴 그림으로 선화의 본을 삼았으며 작금에도 많은 화가들이 묘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호방한 성품의 예술가이며 대 자유인으로 우리나라 전통화의 예맥을 있게 한 크나큰 족적은 후세에 길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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