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千鏡子)는 근대동양화가로 1세대 일본유학파 여류화가이다.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역경을 안고 국내최고의 인기작가로 부상했다. 당시 국내화단에는 남화풍의 수묵 담채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그는 유일하게 채색화로 새로운 회화세계를 열었다. 그리고 보통 화가들이 그리지 않는 개구리와 뱀 같은 징그러운 소재를 선택하여 차별화를 모색하므로서 독특한 개성화가로 부상했다.
1924년 전남 고흥읍에서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현 동경여자미술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경자(鏡子)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4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에 모교인 전남여고미술교사가 되었다. 그해 학교에서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48년에 광주사범학교로 옮겨 재직하면서 서울 동화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6.25동란시기에도 광주역 부근에 뱀 집을 찾아다니며 스케치에 열중했다. 당시 불행했던 시대적 배경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고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뱀 작품이 그의 대표적 이미지화로 자리매김했다. 뱀 그림은 보통사람들이 징그럽다는 이유로 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애호가를 만나기도 어려운 소재였다. 그러나 세인들의 눈길을 끄는 작품으로는 제일이었다. 그래서 일약 뱀 그림 작가로 알려지면서 그의 회화세계는 새로운 예술로 좋은 평가 받았다.
1954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수로 임명되어 서울에 입성했다. 다음해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어 국전에서 특선을 하는 등 활발한 미술활동을 하면서 61년에는 국전추천작가가 되었다. 일본 동경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아사히 산케이 신문에 기사가 실리는 등 호평을 받았다.
70년에는 파리의 초현실주의연구소에서 새로운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남태평양 스케치여행을 하고 귀국하여 풍물스케치 전을 열었다. 71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신촌에 천경자 미술연구소를 개설하였다.
73년에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계스케치여행을 했다. 74년 조선일보에 천경자 아프리카 기행을 연재하면서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품에만 열중했다.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畵文集)을 내면서 문학과 미술을 어우르는 독특한 예술가로 기계의 총애를 받았다.
77년에는 계간미술에서 평론가들이 뽑은 동양화 10대 화가에 선정되었다. 78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자서전을 발간했다. 79년 예술원상을 수상하고 5개월 동안 중남미의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아마존 유역 등을 스케치하고 기행문을 조선일보 연재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 등을 여행하면서 계속 스케치를 했다.
95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1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대규모 초대전을 열었다. 그동안 한국화가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세계여행과 스케치를 하는 등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는 사정만 허락한다면 5천호 가량의 벽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려온 뱀들이 모두 자기 자신이고 가까운 사람들의 형상이라고 했다. 5천호 벽화에 일종의 지옥도 같은 소설가들이 자서전을 쓰듯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도 하고 애기도 낳고 보통 사람들과 같았으나 덧없는 곡절도 겪고 인생을 살면서 고독을 느끼며 살아왔다. 고독함이 사무쳐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상(탱고가 흐르는 황혼)에서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나를 지탱해준 원동력은 ‘꿈’ ‘사랑’ ‘모정’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아닌가싶다. 나의 꿈은 ‘그림’ 이라는 예술과 함께 호흡해왔는데 이것을 뒷받침해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라고 말하는 그는 예술에 대한 애착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팽팽한 버팀목이 되어 예술가의 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용모에 대해서 불만이 깊어 자학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았다. 심지어 여학교를 다닐 때 눈썹이 가늘다고 항상 크레용으로 그려야했고 “생존경쟁의 마라톤에서 바톤을 잡고 고달픈 경쟁을 해야 했던 나는 한편으로 처절한 고독감에 몸부림쳐야 했는데, 그때 어느 관상가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눈썹이 약하니 형제선이 없고 고독하리라’ 그래서 두 아이까지 두었으면서 나는 여전히 세수하고 난 얼굴을 남편에게 보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버젓이 눈썹 그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었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면서도 불안해했고 항상 사랑을 확인하는 등 자학하는 시간이 많았다. 요즈음은 키가 크면 자랑으로 여기지만 그 당시만 해도 키가 큰 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시대적배경이 그를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어느 책에서 개구리를 그리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고교시절 친구와 어느 개울가에서 친구에게 좋아하는 사람을 소개하려했는데 그 친구가 먼저 자기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여 황당한 심정으로 개울을 내려다보니 그때 마침 개구리가 여러 마리가 유영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위안을 받았다. 그 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개구리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훌륭한 사람은 못되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인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업보인지 내 인생은 예술이란 광야에서 별을 찾아 헤매는 무척이나 고독하고 외로운 역경의 길을 걸어와야 했다.” 예술이란 창조행위이기 때문에 고뇌하고 고독하지 않으면 만족한 작품이 기대되지 않는다. 따라서 혼자서 좌절과 절박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부담을 느낀 듯하다.
예술이란 높고 먼 곳에 있으며 그것을 자기 품에 품으려면 무한의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만한 고독을 감수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한 예술가로서 또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최고의 예술정점을 돌파했다. 그리고 자기만의 독특한 특기를 가지고 삶의 여정을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살아온 인생의 파노라마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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