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화단의 거장인 단원 김홍도의 업적은 실로 지대하다. 조선의 삼원삼재 중 한사람으로서 수많은 화가들 중 가장 뛰어난 화가로 화단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김홍도는 인물, 산수, 화조, 영모, 초충, 불화 등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그린 그림은 모두 묘품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당대최고의 어진화사로 왕가와 사대부들이 다투어 소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수한 작품도 많이 남겼다. 유년기부터 세간의 이목을 받았으며 기량이 뛰어나 우리나라 회화사에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불후의 명작을 많이 남긴 것이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22년)는 젊은 시절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2년)문하에서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 하나를 배우면 두 개를 아는 천재적 소질이 있었으며 신비의 화재(畵才)에 주위를 감동시켰다. 특히 인물화에 능하고 풍경도 자연을 함축하여 소화시키는 자기스타일을 창조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김홍도(金弘道)의 호는 단원(檀園), 사능(士能), 단구(丹邱), 단노(檀老), 단옹(檀翁),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畵士), 첩취옹(輒醉翁)이다. 단원은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임금이 총애할 정도로 주가가 높았으며 불후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정조 시대에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모든 분야의 그림을 못하는 것이 없었다. 정부요직이나 부호들의 청탁을 받고 그리는 그림은 모두 상민이나 중인, 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렸다. 인물화 풍속화는 추종을 불허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춘화도까지 능숙한 솜씨로 그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김홍도는 김해(金海)김씨로 부친이 김석무(金錫武)이고 증조부가 김진창(金震昌)이다. 만호벼슬을 지내고 무관집안인 셈이다. 호 단원(檀園)은 명나라의 문인화가인 단원(檀園) 이유방(李琉芳1575~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단원은 어린 시절부터 강세황의 문하에 들어가 화법을 배우고 작품을 하기 시작했으며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중인집안에서 강세황과 같은 대가 집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단원은 어릴 때부터 그림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고 사대부화가인 강세황이 이를 유심히 보고 큰 화가로 키우려는 욕심이 이었기 때문이다. 단원집안에는 화원(畵員)이나 사자관(寫字官)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홍도가 어떻게 강세황과 교제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강세황은 시, 서, 화 3절이고 당대 최고의 감식가이며 정계에도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단원이 화업(畵業)을 영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단원이 정조의 어진을 모시도록 주선해 주었다. 화원이 되고 어진을 모시고 하는 것은 화가로서 최고영광을 누린 것이다. 말년에는 김홍도를 금세의 최고의 신필이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지극히 아끼는 제자로 돌보고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정말로 대단한 총애를 받은 것이다.
정조는 단원을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을 들은 지 오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원으로서 지위(地位)룰 굳히고 화사를 모두 김홍도가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본인의 재주와 환경여건이 좋았으며 강세황이라는 거목이 옆에서 지켜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화가로서의 위치를 확보 하였고 출세가도를 장애 없이 달리게 된 것이다.
단원은 외모가 단정하며 청순한선비의 기질을 타고났으며 마음에 여유로운 아량과 대소사에 매임이 없었으며 신선 같은 사람이었다. 모습부터가 세속을 초월하는 풍채를 지녔으며 회화에서 뿐 아니라 거문고, 당비파, 생황, 퉁소, 등을 연주하는 음악가로도 뛰어났으며 서예가이며 시인이었다.
179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포상으로 현풍현감을 발령 받았다. 중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직함이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로 당대최고의 화가로 따를 자가 없었다. 현풍현감 시절에도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주민들과도 소통이 있었으나 충청위유사 홍대협(洪大協)이 조정에 올린보고가 발단이 되어 부임한지 3년 만에 파직되었다.
1795년 귀경하여 예술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51세의 완숙기에 자기화풍을 정립하고 더욱 뛰어난 실력으로 기계의 총아로 군립하게 되었다. 이때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능행도(陵行圖)를 그리게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가치가 있다. (을묘연화집)과 (병진년화첩)에서 보여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명작이다. 이때 작품이 서정적이며 진경특유의 감흥미가 배어있고 남다른 체취가 느껴진다. 이후 우리농촌의 경직모습과 풍습을 사진을 촬영하는 것처럼 닥치는 대로 그려내었으니 당시의 생활상이 기록화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사진이 없는 시절이라 그러한 기록이 없었다면 당시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기록하는 예술이 참으로 소중하고 귀중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김홍도의 작품에 도석인물도가 많은 것은 당시 서민사회에 도석신앙이 많이 유행했으며 그 시대적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신선도를 그리면서 이전의 중국화풍을 벗어나 자기만이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여 선의 흐름이 유연하고 강약의 변화를 줌으로서 현대적 화법을 구사했다.
김홍도 대형화가로 입증되는 것은 산수, 인물, 도석, 화조, 초충, 불화 등 모든 장르에 능했으며 풍속화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그대로 전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특히 대장간이나 고기잡이, 등 서민들이 생활해 가는 모습을 사진처럼 그려내는 것은 보통 화가들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씨름과 무동, 윷놀이 같은 것은 농민들의 여가선용을 보는듯하여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홍도는 종6품의 벼슬을 지낸 화가로 어진과 궁중 장식(裝飾)도는 물론이고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려냄으로서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삶의 애환을 그대로 표현하는 폭넓은 화가였다.
김홍도는 잘나가는 화가였지만 생활이 곤궁했다. 요즈음 같으면 그 정도의 위치라면 돈방석에 앉을 것이지만 그림을 천기로 알던 조선시대에는 돈과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가지 문화를 보급하는 대가였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다. 씀씀이도 크고 넓은 교유와 후한인심으로 그림공급을 돈으로 연결하지 않고 원하는 자에게는 무료로 그려주는 인심을 썼기 때문이다.
아들 김양기(金良驥), 신윤복, 김득신, 김석신, 이인문, 이재관, 이한철, 유숙 등 당대 대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화가는 시대와 장소를 잘 타고 태어나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걸출한 화가였으나 마지막에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다 세상을 마감하니 그의 유작만 만고에 빛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조선시대 예술인들의 처지가 매우 안타까운 지경에 있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국정을 이어온 조선정책은 망국의 길을 유도 하였고 반상의 국민관리가 나라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화가의 한사람으로서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고 그렇게도 훌륭한 작품을 남긴 화가가 부를 얻지 못한 것은 국가시책이 나쁘다는 증거를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단원김홍도 업적은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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