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아파트 생활과 1950년대 농촌생활을 비교해보면 문화적 차이가 대단히 크다. 그때의 농촌은 그저 살아가는 것 일뿐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원시생활과 비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파트는 현대적 생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최고의 문화적 주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때의 주거문화와 현대의 문화생활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요즈음 안방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과거 농촌의 화장실을 비교해 보곤 한다. 과거 농촌의 화장실은 주거공간의 일부이면서 안집과 거리가 있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비위생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화장실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나는 유년시절 어두운 밤에 화장실에 가려면 무섭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어려워 대변은 참고 소변은 요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 배탈이 나서 참기 어려우면 어른을 깨워서 화장실을 같이 가야하는 때도 있었다. 혹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면 화장실가기가 매우 난감했다. 그때는 화장지가 없었기 때문에 볏짚이나 비료포대 종이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아이들은 제대로 처리가 안 되어 냄새를 풍기는 경우도 있었다.
50년대는 의식주가 큰 문제였으며 특히 농촌의 빈농(貧農)들은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식량구하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흉년이지면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봄에 양식이 바닥나면 들에 나가 쑥을 캐고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등 그 혹독함이 말이 아니었다. 철이 일러 영글지도 않는 감자를 캐거나 산나물을 뜯어서 배를 채우는 비참한 생활을 하는 집이 많았다. 배곯음은 인간이 겪는 가장 서러운 고통이라 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옷은 농촌에서 자급자족 했다. 겨울옷은 무명을 심어 길쌈을 해서 만들어 입었고 여름에는 삼을(대마초) 심어 껍질을 벗겨 이은다음 삼베를 짜고 옷을 만들어 입었다. 명주옷은 여름에 누에를 키워 실을 뽑고 비단을 짜서 혼사나 명절에 갖은 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그러자니 어머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했고 자식들을 먹이려고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물로 배를 채우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농촌을 6.25가 터지면서 망가트리고 생활을 더욱 피폐해져 갔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도 살아남았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한 나라로 오늘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는 선진문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요즈음 생활이 너무 호사스러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혼자서 되뇌일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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