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관아재 조영석의 회화세계

청계 양태석 2013. 8. 20. 14:04

조영석은 조선 3재(齋)화가중의 한사람으로 당대최고의 영예를 누린 영조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산수. 화조. 인물 등 못하는 그림이 없었으며 특히 초상화는 따를 자가 없었다. 풍속화는 현장감이 느껴지는 스케치정신이 투철하며 당시대에 기록화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본관이 함안이며 자는 종보(宗甫)이며 호는 관아재(觀我齋) 또는 석계산인(石溪散人)이라 했다. 직장을 지낸 조해(趙楷)의 4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지방명문가의 출신으로 출세 길이 열려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대부화이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재원이기도 했다. 42세에 이미 의금부도사, 이조자랑을 역임하였고 연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형조자랑과 제천현감을 했으며 50세에 의령현감을 지내고 어진봉사의 명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63세에도 어진봉사의 명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형조자랑, 사옹원 첨정을 거쳐 매천군수를 했다. 통정대부, 첨지주추부사, 돈령부 도정을 거쳐 76세에 별세했다.

화가로서는 참으로 좋은 관직을 두루 거치고 큰 영광을 누렸으나 개인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천직을 누리며 행복한 생활을 하지는 못한 듯하다. 조영석은 그림재주가 뛰어나 명작을 많이 남겼으나 화가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주변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다.

관직을 하면서 화가로 살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가문의 체면과 사회적 여건은 관직을 원하고 개인적 욕구는 화가로 살기를 원했으나 병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영석은 성품이 강직하고 행실이 정직하여 근엄한 규칙을 지켰으며 매사를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것을 한낱 천기로 여기던 시절이라 사대부가의 눈초리는 여전히 따가웠다. 그는 정말그림을 좋아하고 자기는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다고 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조영석은 조실부모하고 형을 부모처럼 의지해서 그런대로 유복한 생활을 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재주가 출중하여 배우지 않아도 보는 대로 잘 그렸다. 10살 위의 겸재정선을 한동네에서 선배로 모시고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겸재에게 배웠다는 기록은 없다. 고관대작들의 소장품인 명대 그림을 보고 그리거나 묘사하는 취미가 그를 화가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인 조영복은 본과에 급제하여 김천군수와 전라우도 암행어사 동래부사를 지냈다. 그리고 형이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신문명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조영석은 앞선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림에도 더욱 새로운 기법연구에 열중했다. 그가 형님 덕으로 좋은 명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은 더욱 그림 쪽으로 빨려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세란 오락가락 하는 것, 조영석 형도 정쟁으로 전라도로 유배를 당했다가 평안도로 이배되던 중 도중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 슬픔이 컸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외곽으로 이주하여 그림에만 몰두했다. 화가들이 틈틈이 연마한 실력이 노년기에 다시 빛을 발하는 것으로서 조영석도 후기그림의 화격이 높다. 그러나 초상화는 젊어서 그린 것이 오히려 정교하고 기가 넘치며 육색이 미려하다.

조영석은 형님인 조영복 초상을 그리고 스승인 이희조의 초상도 그렸다. 여러 사람의 초상을 그렸으나 어진을 모시는 일을 응하지 않은 것이 두 번이나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다른 도화서 화원이 있는데 자기가 봉사하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려 그러했을 가망성이 있다.

어느 날 제천객사에 들렸다가 당호가 없는 것을 보고 스스로 치헌(癡軒)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으며 예술가로서의 흔적을 남겼다.

학문과 미술의 만남은 요즈음 같으면 찰떡궁합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엇박자에 세간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그러나 조영석은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불후의 작품을 남기려고 노력했다.

조영석과 겸재는 이웃에 살았다. 그래서 친구처럼 자주만나고 그림에대해서도 의기투합했다. 재주 있는 화가는 좋은 그림만 봐도 큰 도움이 된다. 두 분이 모두 문학과 미술의 재능이 뛰어나 질 높은 예술의 길을 같이 가고 있었다.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했다. 겸재와 관아재는 시서화(詩書畵) 3절로 당대최고의 예술가였다. 그러한 화가끼리 이웃에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735년에 세조의 영정을 봉안하려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취조를 받은 일이 있다. 관아재는 그러한 행동으로 세간에 말이 많았다. 그 사건이 있고나서 현감자리를 파직당하고 나서 사람들은 기개가 높은 고집쟁이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관아재의 그림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구도가 정연하며 말끔한 화면처리가 돋보였다. 풍속화는 당시대의 현실을 묘사하면서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자기의 사상과 인품을 보여주고 있다.

초상화작품을 살펴보면 안색이 독특하고 의관색이 청아하다. 눈매는 매서운 정기가 느껴지며 전체가 부드럽고 아름답다.

풍속화 중에 어부가족이 합심하여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이 생동감이 있으며 투망을 손질하는 것을 보면 한가로운 선경을 연상케 한다. 영모그림은 정교하고 데생력이 돋보인다. 말을 나무에 묶어놓고 발에 징을 박는 모습은 실감나는 작품이다. 장기를 두는 선비들이나 절구질하는 여인의 모습이 그 시대를 연상케 한다.

조영석이 그림 그리고 학문하고 관직에 나가고 하면서 바쁜 일과에도 곧은 성품 때문에 가난하여 전셋집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대는 화가들이 대가로 인정되면 부자로 살아갈 수 있으나 조선시대만 해도 그림이 돈이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부를 누리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는 강직하고 자존심 높은 화가로 후세에 빛나고 있으며 현대에도 그러한 화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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