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대 화가들 중 자화상이 국보로 지정된 화가는 없다. 특이한 것은 자화상이 정면으로 보는 작품이다. 정면초상화는 귀하지만 귀도 없고 목도 없으며 의복도 보이지 않는다. 장군 같은 모습과 장비 같은 수염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자화상은 측면에서 보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상예이나 이 그림은 정면으로 보는 모습을 그려서 그 모습이 평범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윤두서(尹斗緖)는 166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또는 종애(鍾崖)라 했다. 15세에 전주이씨와 결혼해서 18세에 첫아들을 나았고 20세에 둘째를 얻었다. 나이22세 때 부인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니 다시 장가를 들었다. 둘째부인을 맞이해서 7남 2녀를 두었다. 그리고 26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노비가 500명이고 전답이 2천여 두락이며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윤두서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지방 명문가의 반열에 들었다. 고산은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로 있었으며 임금이 되자 스승에게 녹우당(錄雨堂)이라는 집을 하사했다. 그러한 정치적 입지가 좋은 집안이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예술에 심취했으나 주변사람들이 여러 당쟁으로 옥사를 당하거나 멸문을 당하는 회오리를 겪었으나 귀양을 가는 일이 없었다.
윤두서는 그림재주가 뛰어나 숙종 때 어용청에 예속되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낙향하고 이후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낙향 후 3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애석한일이다. 향년 48세였다. 그 나이에 예술 활동을 접고 병마와 싸우다가 돌아가셨지만 그의 유작은 대단하며 자화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조선시대 화가로서 매우 드문 일이다.
윤두서는 관직에 나갈 여건이 충족되었지만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고 가문의 보존과 예술에 심취한 나머지 집안일을 돌보며 지인들과 교유하는 정도의 일상을 보냈다. 따라서 시. 서. 화에 능하고 경학(經學)과 예론(禮論)에 관심이 높았으며 지리와 의학. 음악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매사에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개척정신이 투철했다.
지도에도 관심이 높아 중국지도와 우리지도를 구비하고 일본지도와비교하며 국토 전반에 걸쳐 연구하였으며 심지어 병서를 탐독하고 나라를 지키는 방법에까지 연구대상이 되었다. 재력이 풍부하고 가문의 전통과 실학파적인 사상과 이념을 두루 갖춘 사대부화가로서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에 심취하면서 정치나 현실권력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시. 서. 화에 관심을 가지고 친구들도 그러한 부류에 의기투합하는 인적구성이 돋보인다.
따라서 신문화(新文化) 도입을 연구하여 우리전통과 혼용하는 정신이 강했으며 개척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고씨역대명공화보(顧氏歷代名公畵譜)가나와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어 조선의 선비화가들도 그에 관심이 높았으며 연구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보다 큰 나라에서 앞선 문화가 수입되어 작은 국가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예나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화가들의 화풍이 중국의 대가들에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당시대에 출판물이 흔하지 않았던 터라 귀한 화보를 보는 자체도 큰 공부가 되었으며 당시 화가들이 그 화보를 본적이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윤두서는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은 기록은 없고 <당시화보>와 <고씨화보>를 참작했으며 국내 대가들의 화첩을 중심으로 자기개성을 나타낸 독특한 화풍의 예술 창조에 노력했다. 국내 유명화가들의 화첩이 이미 많이 보급 되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화본그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의 새로운 기법을 창출했다. 화본을 일부 모사한 그림도 있으나 대상을 직접 사생하여 작품을 완성하였고 데생실력이 대단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러 가지 예능을 겸하고 있었으나 그림에 중점을 두었고 그림중에서도 특히 초상화는 빼어난 재주를 보여 주고 있다.
공재는 말 그림을 잘 그렸다. 말의 모습은 다양하고 박진감이 넘쳐야 수작이기 때문에 데생력이 없으면 그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군마(群馬)도를 즐겨 그렸고 유하백마(柳下白馬)도 주마상춘(走馬賞春)도 마상처사(馬上處士)도 등을 감상해보면 실로 출중한 재주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수욕(水浴)을 즐기는 준마나 땅에서 뒹구는 말의 모습은 대단한 실력이 아니면 그리기 어려운 것이다. 특이한 그림은 낙마(落馬)도라 할 수 있다. 낙마도는 선비가 백마를 타고 고목 밑을 지나다 말에서 떨어지는 그림이다. 아마도 이 그림은 자기의 심경을 털어놓은 그림이라 생각된다.
공재의 작품은 다양하다 특출한 작품이 초상화라 하지만 준마도가 특장이 있고 산수도와 풍속도는 정밀하고 실감나는 작품이 많다. 당시화보에 나오는 그림을 방(倣)한 것이 있으나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농부가 신을 삼는 그림과 여인이 나물 캐는 모습은 실감나는 풍속도라 하겠다. 요즈음은 사진기가 있으니 사진을 참고로 그릴 수 있으나 그때만 해도 데생실력이 없으면 그릴 수 없는 모습들이다. 공재는 명문가에 태어나 부자로 살면서 환쟁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시절에 그림을 그린 것은 참으로 화재가 뛰어나고 인내심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공재는 그림에도 특장이 있었으나 글씨에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그가 만들어낸 글씨가 동국진체라 하여 독특한 서체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는 학문을 숭상하고 예술에 심취하여 일생을 나라에 큰 획을 그으며 살았다. 모든 분야가 완숙해지는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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